그리스도인의 비밀
엡 3:1-13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미국의 보스톤 역에 노부부가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낡고 헤어진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는 곧장 하버드 대학 총장과의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총장 비서는 노부부의 허름한 행색을 보고 얼굴부터 찌푸렸습니다. 노부부가 “총장님을 보러 왔습니다.”하며 면회를 청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장님은 오늘 하루 내내 바쁘십니다.”하고 귀찮은 듯 대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부는 “그럼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총장 비서는 대꾸도 않고 돌아섰습니다. 비서는 보나마나 귀찮은 일 때문에 온 노인인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인데, 지쳐서 곧 일어날 줄 알았던 노부부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총장실에 들어가 보고를 했습니다.
“총장님, 웬 노부부가 찾아왔는데, 잠깐이라도 만나 보셔야 가실 것 같습니다. 얼마나 지독한지...” 총장은 그런 사람 하나도 돌려보내지 못한 비서에게 짜증이 났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바쁩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 아들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1년 전에 그만 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애는 하버드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기념할 만한 것을 이 학교에 세우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총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할머니, 아드님이 우리 하버드에 다니다 죽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들의 동상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운다면, 우리의 학교는 캠퍼스가 아니라 공동묘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을 가로저으면서, “저희는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기념해서 건물을 하나 지어 기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총장은 노부부의 초라한 행색을 다시 훑어보더니, “할머니, 건물 하나를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 지나 아십니까? 하버드를 짓는데 750만 달러나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할아버지에게 속삭였습니다. “그 정도면 대학 하나 세울 수 있나 보죠? 이 학교에서는 우리 뜻을 받아줄 의향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우리 아들을 기념해서 대학교나 하나 만드는 게 어떨까요?” 그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와 함께 아무말 없이 총장실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이들 노부부는 자신들의 뜻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는 하버드 대학 대신, 서부 캘리포니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을 기념하여 대학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 대학이 바로 스탠포드 대학이고, 이 노부부는 서부의 명문인 스탠포드 대학의 설립자, 리랜드 스탠포드 부부였습니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나 비서는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댓가로 거액의 기부금을 받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겉모양이 아름다운 버섯일수록 독버섯일 경우가 많고, 가시돋힌 꽃이 더 아름다고 향기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겉 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고, 또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구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왜곡된 메시야 대망사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두 개의 언약 전통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흘러 내려왔는데, 하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을 경험한 이후 형성된 ‘출애굽 전통’이며, 또 하나는 다윗이 강력한 왕국을 이룬 후 성립된 ‘다윗전통’입니다. 주로 구약의 예언자들은 출애굽 전통을 강조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되새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반면, 나단 선지자나 제사장 및 지도층들은 하나님이 다윗 가문을 영원히 지켜 주실 것이라는 다윗 전통을 강조하였는데,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에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등장할 것이라는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다윗처럼 강력한 왕이 다시 나와서 이스라엘을 외세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는 메시야 대망사상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그런 힘을 바탕으로 한 메시야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도 그 당시의 왜곡된 메시야 대망사상을 정면으로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다윗 왕처럼 능력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왕이 될 때, 한 자리씩 차지하기를 기대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망상을 꾸짖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은 철저히 출애굽 언약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강조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죄인들과 어울렸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던 이방인들과 상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면서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가득차 있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정통한 자들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면서도, 정작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된 축복받은 민족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두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유대인으로 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 만을 내세우다가, 정작 그들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을 혐오하고 멸시하며 자신들의 전통만을 내세웠습니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복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똑같이 이방인들도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혈통’을 비롯하여 그 어떤 조건도 구원의 반열에 차별을 두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34장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나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송가 3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비밀의 전파자가 된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 곧 복음을 자기의 동족에게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동족들은 자기가 예수를 만나기 전과 같이 예수를 배척하기만 할 뿐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기만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바울을 주님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지금 에베소서를 쓰고 있는 곳도 유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고 먼 로마, 그것도 차디찬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어디나 마다하지 않았고, 고난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 역시 그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고, 암흑에 처해있던 이방인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능히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8-9)
바울은 이처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것을 보면서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이 구원을 얻는 일에 참여하는 복음의 증인, 구원의 증인이 되는 것보다 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또한 로마제국의 무서운 박해를 받고, 사자굴에 던져지면서도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감격을 우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바울처럼, 사도들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며 함께 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