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주의 손에
대상 29:10-15
목사인 척 스미스Chuck Smith)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그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스미스, 자네가 교회를 개척하는데 좀 도와주고 싶네. 지금은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니 약간의 돈을 부치겠네.”라고 했습니다. 척 스미스는 그 친구의 전화를 받고 펄쩍 뛰면서 기뻐했습니다. 그 친구는 적은 액수를 보낸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보내준 돈을 확인하고 더욱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친구가 보내준 돈이 빚을 갚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방으로 달려가 아내를 끌어 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미스야 내가 어찌하여 춤을 추느냐?”
“네, 친구가 돈을 보내줘서 빚도 갚고 이제 마음 놓고 목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쁜 마음에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돈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는 아주 믿을만한 친구니까, 곧 보내줄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도와주고, 인도할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그때 그것으로 네가 감사를 드렸느냐? 아니면 내 앞에서 좋아서 춤을 추었느냐?”고 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하나님이 약속보다 친구의 후원전화 한통에 더 기뻐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오늘은 201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시간 잠깐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고 살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습니까? 혹시 하나님보다 세상 것에 더 집착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축복의 약속을 하셨는데, 우리의 어려운 형편만 생각하고 걱정 근심으로 일 년을 보내지는 않았습니까?
유대인의 격언집인 탈무드에 보면, 인간에게 세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가장 귀한 친구, 좀 덜한 친구, 하찮은 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적인 이야기로서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첫째 친구는 돈이었습니다. 둘째 친구는 가족, 친지, 친족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선행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최고로 압니다.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코 재물(資)은 우리 인생의 근본(本)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근본은 재물이 아니라, 그 재물의 근본 주인이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부와 귀(富貴)가 주께로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요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보다, 재물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재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경제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근대 사회학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학자,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이라는 책에서, 합법적인 이윤의 획득을 소명으로 삼고, 조직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정신적인 태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소명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업에로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직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칼빈의 ‘직업소명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칼빈은 ‘직업이 곧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일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고 존재의 의미를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공업자들은 이러한 직업소명설을 열렬하게 지지했고, 막스 베버는 이를 토대로 개신교가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경제윤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을 지상 최고의 과제로 아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버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정당한 방법으로 버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버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가는 부정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자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1-4)
오늘날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경제적 약자에게 돌아가야할 몫을 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즉 각종 불합리한 제도와 법률을 근거로하여 경제적 약자를 착취해서 재산을 축적하는 기업이나 재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용납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사업이나 직장에서 옳지 못한 방법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할 정도입니다. 부동산 투기나 담합, 불공정 거래, 조세회피, 횡령, 돈세탁, 불법 증여 등, 오늘날엔 지능적인 경제 범죄가 만연해 있는데, 그 어떤 방식이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서 막대한 부당이익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치 않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암 5:11).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방법으로 직장생활과 사업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돈을 열심히 벌어서 보람있게 써야 합니다.
돈을 모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모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죄를 범하는 도구가 됩니다. 뉴스에서 사기, 절도,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유흥비로 썼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하게 재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번 돈을 가지고,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기 때문에, 또는 내가 사업을 해서 번 돈이기 때문에 모든 재물은 ‘내 것’이며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아니했으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허락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드릴 뿐입니다. 주께서 주신 것을 다시 주께 드리는 데 무슨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무슨 아까울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다윗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께 드리는 것은 인색하거나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모릅니다. 주님께 풍성하게 드릴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가진 것이 풍성하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여러분 모두가 드리는 즐거움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벌어서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드린다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있어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허무한 인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것은, 이 땅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쓰여집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나눌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 보면,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나오는데,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여신도였습니다. 그녀는 특히 많은 미망인들의 후견인이요 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미망인들을 돌보아 왔는데, 그런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미망인들이 다비다로부터 받은 옷을 들고 와서는 모두 슬피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이웃을 돕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다비다처럼 주변에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금전출납부에 ‘구제’란이 있어야 합니다. 매월 작은 금액이라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여지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월 1회씩 구제 헌금을 자발적으로 합니다. 또한 많은 미자립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재물을 쓰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경제관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을 마무리 하면서, 다른 것보다 그리스도인다운 경제관을 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의 손에서 온 것인 줄을 알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주의 것을 가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