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상속자
갈 4:1-7
요즘 우리나라의 재벌 그룹 대부분이 3세로 재산 상속을 추진하면서, 아직 젊은 나이에 그 엄청난 회사를 상속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재벌 3세들 가운데는 해외 유학도 하고, 실력도 있어서, 경영을 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상속자들의 경영이 미숙하여 해체의 수순을 밟거나, 실적이 하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들은 단지 ‘부모 잘 만나서’ 젊은 나이에 회사의 경영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온실에서 자란 식물처럼 생명력이나 경쟁력이 없어서, 회사를 유지 발전시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재벌 3세의 경영능력에 대해 조사했던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경영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 3세들이 없었고, 상당수의 재벌 3세들이 불법 등 도덕성 문제와 연루되어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벌2, 3세의 불법 승계가 나라 망친다”며 “불법 승계로 인한 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이 필요하다” 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입사원이 되어 계단을 밟아 올라 가면서, 많은 시련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29세의 나이로 주석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젊은 나이에 재벌 그룹의 후계자로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 방송국(YTN)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15대 재벌의 3세들은 평균 28세에 입사하여 31세에 처음 임원에 오른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행운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세습으로 인한 재벌 3세의 존재는, 불공평하고 부정의한 사회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보통 사람들도 상속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상속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주택 한 채 정도이고, 그나마 대부분의 서민들은 거의 상속이 없거나 부모의 ‘빚’을 상속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호적상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누구는 빚더미를 상속받기도하고, 누구는 막대한 부를 상속받아, 출발부터 불평등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적어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상속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장남은 다른 아들의 배를 받았습니다(신 21:17). 하지만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집에서 신임하는 종을 상속자로 세울 수도 있습니다(창 15:2). 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경우에는 딸이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민 27:1-8). 그리고 딸마저도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이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민 27:9-11).
이렇게 유대사회의 상속제도는 딸과 종들에게까지도 상속 대상을 확대하는, 그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장자로 상속의 우선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는 상속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12세에 성인의식을 거행하는데, 성인의식을 마치고 성인이 되기 전에는, 아들이라 하더라도 노예나 종의 신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즉, 아무리 상속자라 하더라도,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학식이 뛰어난 노예 출신의 가정교사인 후견인이나,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지의 감독과 보호를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갈 4:1-2)
이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는 상속자로서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성대하게 치루었습니다. 성인식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과, 인간으로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에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거두어 가셨나이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렸고,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는 “나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어린이로부터 어른이 되게 하시는 이 엄숙하고도 거룩한 날에, 나는 겸손히 눈을 들어 당신을 보오며, 이후로 나는 당신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당신에게 대한 나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의무를 다할 것을, 성실과 진실함을 가지고 선언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성인식이야말로 인생의 뚜렷한 경계선이며, 이제 어린이로부터 ‘장년’으로서 대접받게 될 뿐만아니라,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그때부터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녀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고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와같은 관습에 빗대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3).
바울은 예수를 믿는 이들이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은, 마치 성인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처럼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지도 아래 있는 상태와 같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삼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그저 하나님을 어렴풋하게 알 정도의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성인식을 치룬 이들은 더 이상 초등교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벗어나 상속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은, 그때까지 그들을 인도하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안내할 뿐이고, 진정한 구속 사역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이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율법처럼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만능주의’와 ‘물질주의’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인하여 우리는 ‘최첨단’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상상만 하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는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물질주의’와도 연관되는데, 과학기술은 근본적으로 풍요로운 물질 소비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발전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생명이나, 사랑, 배려, 나눔 같은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은 아무리 그 겉모습이 화려해보이고, 대단해 보여도, 인간을 진정으로 성숙케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바울이 말한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골 2:20-21)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즉 초등학문 같은 것에는 우리들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죄의 종들인 우리를 위해서, 그 고귀하신 주님의 몸을 드리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양자)로 입양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빠”라는 아람어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신약성서학자인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 1900-1979)라는 신학자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해석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해석을 따랐습니다. 게다가 우리말의 “아빠”와도 발음과 의미가 같아서, 본문의 “아빠”라는 말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친근한 ‘유아기적 호칭’이라고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빠’라는 용어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아버지에 대한 경애(敬愛)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사를 책임지는 절대적인 보호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대적인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이나 바울이 하나님께 어리광을 부리기 위해, “아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성숙하게 깨달은 것을 표현한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리광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무한한 애정과 공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부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자체로 큰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재벌총수나 최고 통치권자의 자녀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권세를 부립니까? 남들 다가는 군대도 안가고, 젊은 나이에 그룹 임원이나 사장, 회장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천지를 지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4:7).
전통적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상속자는 아버지의 재산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와 지위까지도 상속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원로원 의원이었던 옥타비아누스(B.C.27-A.D.12)는 줄리어스 시저의 양자로 입양되어 황제의 권한까지 상속받아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후, 200년 동안 로마의 평화를 구축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율법과 죄의 노예요, 죽음에서 도저히 건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으나, 우리를 건지기 위해 이 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상속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세속에 종이 되어,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세상의 학문과 과학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주의 일보다 세상일에 더 분주하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이익에 혈안이 되는 것 또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노예 자리로 향해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존귀한 사람인 것을 명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라는 말씀처럼,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거룩한 일에 나서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