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자의 아들
갈 4:21-5:1
우리 성도 한 분이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친구 중에 사업을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만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8천 만 원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돈은 자기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적금을 들고 있던 5천 만 원과, 언니에게 빌린 3천 만 원을 합한 돈으로 너무나도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평소에 워낙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구의 사업이 그 후로도 수습되지 않은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빌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찾아갔더니, 십여 명의 채권자들이 모여서, 그 친구에게 따지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성도 분도 빌려간 돈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는 지 듣고 싶었지만, 그 채권자들 틈에 끼어서 친구를 몰아세울 수가 없어서 그냥 조용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주일날 아침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가 9시 쯤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전 가족이 도피하게 되었다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낮 12시 비행기로 떠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친구에게는 일부라도 갚고 떠나려고 하니, 10시 30분까지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2천 만 원이라도 갚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 성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했던 적금과, 언니에게 빌린 돈을 다 잃어버릴 뻔 했는데, 2천 만 원이라도 받기 위해 인청공항으로 나가면 예배를 못드릴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면, 이제 영영 그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자신의 소중한 돈 가운데 일부라도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냐 돈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도 없이 예배를 선택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고,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하고는 인천공항이 아닌, 교회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머릿속에서 ‘2천 만 원도 상당한 돈인데, 그 돈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그의 마음에 평안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성도의 간증을 듣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의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원문에 보면 ‘재물’은 단순한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맘몬’(Momm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신, 돈 신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돈은 인간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다 누리고 살고 싶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에 매어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양쪽을 걸치고 사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가 아닌 돈을 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는 것도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특징을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성경에는 비유와 풍유가 많이 나오는데, 비유(Parable)와 풍유(Allegory)는 다릅니다. ‘비유’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고, ‘풍유’는 문자 하나하나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풍유로써, 바울은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allegory)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 4:22-24)
바울은 먼저,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율법 언약’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바울은 이스마엘이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낳은 아들’이며, 율법은 이처럼 ‘육신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본부인이 아닌 여종 하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도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율법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를 통해서 태어난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태어난 “약속의 자녀”(28절)라고 했습니다. 본래 불임이었던 사라는 나이 9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은 이스마엘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바울은 이렇게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하면서, 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율법을 따라가므로 율법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어주고자 하시는데, 이삭을 버리고,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보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육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에게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차는 14살 정도였는데, 하루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고 있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창 21:9). 이를 두고,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당시에 율법을 따르는,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박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그때, 어린 이삭은 이미 청소년이 된 이스마엘의 박해를 거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도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율법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난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서 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자 오히려 이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것입니다. 원래는 교회가 교회답게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오히려 교회답지 못함으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은 성도답게 행동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낮은 윤리 의식과 천박한 언행으로 비난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의 어린 아들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 지나친 처사처럼 보입니다. 애초에 하갈을 통해 후사를 잇자고 제안한 것도 사라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이 아들을 낳으니까, 그 여종과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다니, 정말 파렴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두고 매우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언약의 기업이 누구를 통해 이어지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브라함에게 사라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를 인정하셨습니다. 대신 그들을 위한 별도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 21:13).
아브라함의 두 아들 가운데, 결국 이삭이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자녀이며, 자유자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자유있는 여자의 자녀’라고 하면서(3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리의 종’, ‘물질의 종’, ‘세속의 종’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믿음만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교리에 속박되어, 종교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종이 되어 신앙도 인간성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세상 연락을 즐기는데 빠져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핏 값으로 얻은 자유를 저버리고, 영혼을 팔아먹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는 그러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하는 여자의 후손이며, 이삭의 후손들입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