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바람직한 삶
갈 5:13-26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낯설고 척박한 신대륙에서의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첫 겨울을 날 때는, 먹을 것이 너무 부족해서, 한 사람이 하루에 옥수수 다섯 개로 연명해야 했다고 합니다. 또 그 해 겨울에 추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절반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비참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듬해 봄,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사는 모습을 딱하게 여긴 선장은 출발 전에 “지금이라도 본국으로 돌아갈 사람은 이 배에 타십시오. 무료로 승선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너도나도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영국 본토로 돌아가면 먹을 것도 있고, 거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기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배를 타고 돌아간 사람은 선장과 선원 몇 사람에 불과하였고, 청교도들 중에는 한 사람도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 겨울을 나는 동안 절반이 죽고, 옥수수 다섯 개로 겨우 연명하는 고생을 하면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아무도 고생스러운 생활로 인해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힘차게 신대륙 개척에 힘을 쏟았던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과 자유를 얻는다는 사실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이방 선교 사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얻었으니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가르침을 오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린도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들 중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오해해서 신앙생활이 방종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우상 신전에서 사용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 나오는데, 고린도 교인 가운데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음으로써 믿음의 형제들이 실족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고 권면하였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보면, 교인들 가운데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음행을 행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울이 이를 개탄하기도 했는데, 이는 고린도시의 타락한 성문화가 교회에까지 스며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고린도 교회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위에서 육체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열거한 것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도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도덕폐기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 받기 때문에, 일단 예수를 믿으면 무슨 일을 해도 다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구원파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교회의 신자들도 이러한 ‘안일한 믿음주의’에 빠져서, 믿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부끄러운 구원’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회개가 필요 없습니다. 회개란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 놓았으니, 또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적으로도, 기독교 윤리적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복음의 기초 진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날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그에 합당한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을 때, 세리와 군인들이 찾아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세리에게는 정해진 세금만 거두고, 군인에게는 정해진 월급에 만족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부정부패했던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은 우리가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원이란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삶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해 주신 것은, 그 자유를 가지고 방종의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고, 자유롭게 이웃을 섬기는 가운데 내적인 자유를 향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3절)
여기서 “기회”라는 말은, 원래 작전기지(a base of operation)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기회”란 ‘육체의 소욕을 행하기 위한 교두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유를 방종을 위한 교두보로 삼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이 자유는 육체의 소욕을 쫓아 악을 행해도 된다는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 가운데 얻은 자유를 올바로 누리는 방법은 그와 정반대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삼스럽게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라는 것을 생각할 때, 권위로부터의 자유, 욕심으로부터의 자유, 전통으로부터의 자유, 독재로부터의 자유 등,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추상적인 개념의 자유입니다. 더욱 현실적이고 진정한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무엇인가에 자유롭게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 자발성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의 종’은 강제성을 띠지만,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차원의 ‘종노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는 이제 ‘주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주의 종이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랑의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섬김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며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백영규 전도사라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인물도 미남이고, 머리도 좋은 분이었는데 평생을 결혼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1958년에는 군산시에, 사회로부터 버려진 오갈 데 없는 부랑자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훗날 신애원이라는 시설로 발전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노숙자들, 행려병자들이 죽으면 그 시체를 염을 하고 장례를 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에 감격하여 평생을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못하지만 우리의 있는 곳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금식기도,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한 헌금 등 우리의 작은 몸짓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죄의 본성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같은 성자도 이럴 정도인데, 우리 같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스스로 의롭다고 당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죄성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여기서 “행하라”는 말은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쫓아 걸어가면 본문에서 말한, 음행, 호색, 우상숭배, 분쟁, 시기, 방탕함 등(19-20)이 아무리 우리를 가로 막아도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단히 기도하면서 말씀에 따라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려면, 세상의 헛된 야망을 버리고,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
교인들 가운데에도 가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학문을 더 신뢰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헛된 영광을 구하려다가 술수를 부리고, 이웃과 원수를 맺으며, 결국 분쟁을 일으킵니다. 분파를 조성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헛된 영광, 헛된 야망을 버리고 어디가나 평화를 만드는 화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자기를 그렇게 억압하고, 26년 동안이나 감옥에 쳐 넣었던 원수들인 백인들을 용서하고, 화해와 평화를 끝까지 추구했던 만델라의 위대한 신앙을 우리들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며, 자유인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다시 죄짓는데 사용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을 극복하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성령을 따라, 말씀을 따라 살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을 섬긴다면, 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한다며,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섬기며 화해와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