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유
갈 5:1-12
알렉스 헤일리의 책 “뿌리”를 보면, 아프리카 흑인들이 신대륙에 노예로 팔려가 비참한 생활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쿤타킨테도 백인 노예 사냥꾼에 의해 잠비아에서 붙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노예 수송선 지하창고에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몇 달간을 누워서 신대륙으로 실려갔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흑인들은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는데, 백인 주인들의 모진 학대와 멸시를 감수하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신대륙의 백인들은 거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인간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해 나가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흑인 노예의 주인이며, 자유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야말로 죄와 탐욕의 노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던 흑인들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날마다 슬피 울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어디에서 끌려 왔는지도 잊어가기 시작했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참함 속에서 희망을 꿈꾸던 한 흑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역시 흑인으로서 온갖 차별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훗날 목사가 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흑인들 또한 백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특히 1963년의 워싱턴 평화 대행진 때,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을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흑인들의 후손들이 백인과 함께 자유롭게 뛰노는 꿈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연설문 중 일부 인용)
이 연설은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에게 ‘자유’란 가장 고귀한 가치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바로 이 자유를 외치다가 1968년에 그만 백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후손들의 자유를 위해서 순교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그의 외침의 씨앗은, 45년 후 흑인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를 통해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이처럼 자유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는 반드시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만 보더라도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고, 이승만 독재정권 아래서는 4.19 혁명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였으며,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자유를 위한 처절한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얻어낸 자유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자유’의 가치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곧 ‘전인적인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경제적 자유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영적인 자유까지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된 주제 또한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세운 갈라디아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율법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받아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가르침에 빠져 할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자유하게 된 이들이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처사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자유를 얻은 이들은 그 자유를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그것을 통해서 주신 자유를 무효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할례의 필요성에 대한 증거를 율법에 두고 있었습니다. 할례가 율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율법에서 말하는 다른 모든 지시사항도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하지만 이들은 할례의 규정만 따랐을 뿐이지 다른 율법 전체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전체를 행하지도 않고, 율법을 통해 의로워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더구나 율법을 그렇게 앞세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바울은 율법을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할례와 그리스도는 양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다면 할례를 받아서는 안된다’, ‘할례를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부인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듯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할례를 받든 안 받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율법이나 할례 등의 절차나 의식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바울은 왜 그토록 할례를 반대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차별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강조함으로써, 할례를 받을 수 없는 이방인과 여자와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차별했습니다. 이방인과 여자와 장애인에게도 주어졌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제한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토록 할례를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기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 생명까지 내어주신 고귀한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든 성도의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의 결과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 존귀하신 분이신데 그 고귀한 희생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실상 우리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종으로 이미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주신 자유를 지키는 길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얻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우리나라에 와서 44년 동안 의료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입니다. 그녀가 평양에서 의료 선교를 할 때, 하루는 집에 불이 나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온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자, 그녀의 부모가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여인의 피부 대신 자신의 피부를 떼어 수술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녀는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여자 의료 선교사로서,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은, 이와 같은 초대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인이 된 것에 감사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모든 것을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유인이 되었는데, 어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종노릇을 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다른 것에 종이 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적인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받아 율법의 종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책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기 전에, 그들을 잘못 인도한 지도자들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의 꾀임에 넘어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갈 5:7-10)
“다른 마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일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적인 물질, 명예, 권력, 쾌락 등에 집착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도 3년이나 예수를 따랐던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돈 몇 푼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마 26:14-16). 바울의 제자 데마는 로마 감옥에 갇힌 스승 바울을 떠나버렸습니다(딤후 4:10).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드리면서도, 앞으로 살아갈 걱정 때문에 베드로를 속였다가, 성령을 속인 자로 저주를 받았습니다(행 5:1-11). 구약성경에서도 발람은 돈 욕심 때문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였다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민 22:5,7). 엘리사의 시종이었던 게하시도 나아만을 속여 예물을 받았다가 그 벌로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왕하5:20-27).
이처럼 성경에는 믿음을 져버리고 세상적인 욕심을 앞세우다가, 저주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가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따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마음을 가지도록 조장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더욱 엄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0, 12절).
“베어버리라”는 말은 “거세하라”는 말인데, 바울은 할례를 강요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을 혼란케하는 유대주의자들은 아예 거세를 하라고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교회에서 온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혼란케하는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같은 이단사이비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는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의 윤리적 타락과, 그것을 방조 혹은 조장해온 번영신학과 물질주의, 편협한 교리주의와 개인영성주의 등도 교회에서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주의자들과 같은 준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귀한 몸을 드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믿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의 이런 희생적 사랑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세상의 모든 거짓된 것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단 사이비 뿐만 아니라,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과, 교회 안에 만연한 편협하고 왜곡된 교리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그 싸움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언제까지나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