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목회] 강남교회 전병금 은퇴목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사회구원은 개인구원보다 앞설 수 없다”
“역사와 함께 하면서 시대를 개혁해 나가야”
“3·1운동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국교회 산다”
“한목협 창립과 CBS이사장 때 일 기억남아”
은퇴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이미 은퇴하신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은퇴 모습을 제시하려 1부 전병금 목사의 목회 스토리, 2부 후배 목사들에게 바라는 미래목회와 은퇴 준비, 그리고 목회유산 상속으로 구성했다.
대담자 이창연 주필, 정리 이신성 기자
1부 나의 목회 스토리
지구촌구호개발연대 사무실에서의 전병금 목사. 이신성 기자
Q.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동기나 계기는?
6·25 사변 전에 아버지가 분가해서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군산에서 쌀을 구매하여 대전까지 가서 쌀을 팔면서 자수성가하셨다. 6·25 사변 이후 군산비행장과 미군기지 확장으로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집과 땅이 전부 징발됐다. 논, 밭, 집을 보상도 못받고 빼앗겼다. 그때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까지 얻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무당까지 불러서 굿을 했다. 무당들이 굿을 하는데, 동네 전도부인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전도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예수를 한 번 믿어보자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를 처음 갔는데,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온식구가 너무나 평안하고 좋았다. 어버지는 교회 출석한지 1년 만에 집사가 되어 2년 동안 교회를 섬기다 교회에 나간지 3년 만에 돌아가셨다. 교회가 초가집이었는데 사택도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교회 건축 비용의 3분의 1을 부담하겠다고 하셨고, 결국 장로님이 3분의 1, 전교인이 나머지 3분의 1씩 부담하자고 해서 교회를 짓게 됐고 그렇게 3년 동안 아버지는 예수를 열심히 믿고 섬기셨다.
신학교를 가야하는데, 교단이 기장이라서 한신대에 가게 됐다. 그게 숙명이고 하나님께 붙잡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학교 2학년 때 1965년 6.3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1964년부터 정부가 진행하는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시국문제로 한신대가 데모했는데,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데모에 참여한 것이 최초다. 그 운동에 참여하다 정학도 당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운동권이라는 것은 없었고 일본에 당한 것, 일본이 행한 일들이 너무 심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종필과 일본의 오하라 마사요시와의 비밀협약에 문제를 삼았다. 전국민의 공감대를 가지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일본과 정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위원회가 재야에서 생겼다.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목사가 참여했다. 그때 투쟁위원회 총무가 한신대의 전경연 교수였다. 집회 같은 데 참석하면서 기독교가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역사와 함께 나가면서 시대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인사들은 평신도들이었다. 선교사들이 보수적으로 가르쳤는데도 진보적인 일에 나선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독립해방이라고 믿고 애국과 신앙을 연결시켰다. 그들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쟁했다. 그때의 신앙으로 한국교회가 돌아가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신앙의 내면화, 영적 구원만 말하는 것은 문제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거기서 하나 더 나아간 것이 신자를 세상에 파견하신 것, 즉 세상을 변화시키는 견인차로 파송하신 것이다. 한국교회는 절름발이 신학을 가르쳐서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사사화된 신앙에서 뛰쳐나가야 공적 신학, 공공신학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Q. 강남교회에서 37년 담임목회를 했는데,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존경받으며 목회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구리 도농교회에서 4년 동안의 담임목회를 한 후 강남교회로 갔다. 그 당시 강남교회는 소위 기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70%)과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30%)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장성을 주장하는 분들은 진보적 신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해서 술마시는 것도 일상이었다. 교회가 창립된지 9주년이었는데 목사님들이 네 분이나 거쳐갔다. 그런 분위기에서 엉거주춤하다가 쫓겨난 것이다. 나는 부임 후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막았다. 부임한지 1년이 지날 무렵 창립 10주년 잔치에 구역별로 음식을 해서 나눠 먹었다. 그런데 집사 한 명이 10년 된 식혜가 맛있으니 마시라고 광고했다. 알고 보니 막걸리였다! 사모가 식혜 가지러 갔다가 알려줬다. 그때 사찰 집사를 불러서 저걸 갖다가 교회 옆 교인 집에 가져다 놓고 먹고 싶은 사람은 거기서 먹으라고 했다. 이런 일을 알게 된 보수적인 장로는 교회에서 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치리보다는 그들과 함께 한 장로에게 잘 설득해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도록 당회록에 기록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교인들이 찾아와 목사가 신학교 때 운동을 했다더니 쪼다라고 하면서 제직 사표를 냈다. 그 밤에 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이 목사 추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결국 뜻대로 안되자 그 사람들이 나가서 개척했다. 그렇게 된 뒤에 오히려 교회는 더 성장했다. 교단 내 큰 교회인 한신교회와 비슷한 규모가 됐다.
인터뷰하는 전병금 목사. 이신성 기자
Q. 목사들마다 목회의 특징, 철학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 훈련, 하용조 목사는 아버지학교, 손인웅 목사는 오색 목회로 유명하다. 목사님의 목회 철학은?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받고 제자되는 것인데, 내면적인 신앙, 영적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성,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세상 속에서는 파송받은 개혁자, 선교사로 살아야 한다. 영적 구원, 사회 구원을 하나로 봐야 한다. 기장 안에서는 사회적 구원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회구원은 개인구원보다 앞설 수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해서 나가야 한다. 자기가 이데올로기, 이념을 가지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운동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얻어서 세상에 나가서 어려움 속에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고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이라는 것을 하나로 보는 통전적 구원신학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강남교회는 변두리 교회로서 인물을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일학교 비전스쿨을 만들었다. 미국 목사를 부목사로 청빙해서 그들이 토요일에 하루를 같이 보내게 했다. 성경과 영어 훈련을 시켰다. 필리핀에 센터도 만들었다. 방학 때에는 그쪽에 가서 영어 공부하고 교역자는 신앙교육을 하게 했다. 3년 동안 갔다오면 영어를 잘하고 신앙도 자란다. 이 민족을 섬기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봉사자가 되도록 다음 세대 교육에 힘썼다.
1991년에 노회장을 했는데, 매년 교회를 하나씩 개척했다. 선교사들을 지원도 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Q. 후임자를 청빙한 후에 분쟁이 일어난 교회가 많다. 후임자를 어떤 기준으로 정했나?
은퇴 6개월 전에 청빙 위원회를 구성했다. 시무장로들 뿐만 아니라 남전도회, 여전도회, 권사회 2명씩하고 청년회 1명이 참여하게 했다. 두 사람을 정해서 당회로 올리게 하고 당회에서 한 사람으로 정한 뒤에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열어 결정하자고 했다. 최종 두 사람을 택하고 그 중에서 1명을 당회에서 정하려 했다. 그런데 당회원들이 우리가 정하면 갈라지니, 목사님이 정해주면 당회에서 결의하고 제직회와 공동의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강남교회에서 부목사로 9년 섬긴 사람으로 정했다. 나보다 사랑이 많으니 교인들이 위로받으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목회를 잘 하고 있다. 성공적이다.
Q. 원로 목사와 후임 담임 목사의 갈등이 일어난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원로 목사는 그 교회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를 받들 듯이 잘 받들고, 그분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목회하면 불만이 없을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내가 담임이라고 생각하며 원로 목사의 말을 안듣는 것이 문제다. 원로 목사는 이야기할 데가 없어서 섭섭한데, 담임 목사마저 그렇게 나오면 거기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서로가 잘 해야 한다.
Q.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 생명의 전화, CBS 등 교계에서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은 지구촌구호개발연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에 관심 갖고 사역을 하고 있다. 미얀마 사태에 대한 대책이나 지원은?
미얀마라고 하는 나라는 인도 옆에 있다. 방글라데시가 그 사이에 있다. 영국에서 서남아시아를 차지하면서 인도를 지배하고 미얀마도 지배했다. 그런데 미얀마를 지배하면서 미얀마 사람을 시키지 않고, 인도의 로힝야족을 강제 이주시켜 관리했다.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안준다. 시민권이 없으니 학교를 못다닌다. 호적도 없다. 그러니 의료도 안되고, 취직도 안된다. 미얀마 사람들은 영국이 원수가 아니라 로힝야족이 원수다. 결국 로힝야 족이 2015년부터 폭동을 일으켰다. 경찰서 30개에 불을 지르고 반군도 등장했다. 그런데 미얀마 군부가 로힝야족을 학살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그래서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많이 망명했다. 그때 노벨상 받은 아웅산 수치가 군부의 일을 묵인했다. 그 일로 아웅산 수치의 동상을 옥스퍼드에서 치우게 됐다. 우리 나라에서도 로힝야를 지원하고 싶어도 아웅산 수치의 눈치를 보고, 방글라데시 정부를 통해야 하는데 잘 안된다. 지금 미얀마는 5·18광주민주화 운동과 같은 분위기다. 영적 연대와 도움이 필요하다. 지구촌구호개발연대에서는 로힝야족을 위한 병원 지원과 고아원 사역을 하고 있다.
대답하는 전병금 목사와 이창연 주필. 이신성 기자.
Q. 목회하시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 혹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1996년에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주최로 한국100주년기념관에서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정책협의회가 있었다. 그때 기장, 통합, 합동 교단의 중견 목회자들을 초청했는데, 합동에서는 옥한흠(사랑의교회), 통합에서는 손인웅(덕수교회), 기장에서는 내가 발제를 맡았다. 옥한흠 목사와 손인웅 목사, 손인웅 목사와 나는 각각 2살 터울이다. 그때 교회 연합을 논의하고 연구 모임 만들어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를 창립했다. 그게 나중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됐다. 15개 교단의 연합을 이뤘다. 옥한흠 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지금 보면 성과가 없는데, 그래도 보수와 진보가 함께 앉아 뜻을 같이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CBS 이사장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디어랩 법안 국회 통과이고, 다른 하나는 CBS와 OBS 경인방송 간에 심각한 재판이 있었는데 재판 중 백성학 대표와 전격적으로 합의하게 한 것이다. 미디어랩 법안이 통과되어 CBS가 경영 상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됐고, 백성학 대표와의 재판에서 CBS는 약 25억원의 재판비로 인하여 큰 손해를 볼 뿐만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할뻔 했는데 원만히 합의가 이루어져 조용히 해결됐다.
출처 : 가스펠투데이(http://www.gospel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