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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로힝야 난민촌을 찾아서
김지연(다큐멘터리 사진가) | 승인 2018.08.16 21:02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로힝야 난민촌이 있는 콕스바자르까지 가려면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 그리고 또 차로 2시간 넘게 들어가서야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난민촌에 들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30여 분 정도 더 들어가니 한국의 (사)지구촌구호연대가 운영하는 캠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만났다. 15년 전쯤에 한국에서 만났던 방글라데시인 하룬(47세) 씨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캠프
하룬(47세) 씨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1992년 한국에 들어와 외국인노동자로 13년을 살았다. 한국으로 오기 전 다카대학 법대생이었던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더 이상 고국에 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한국행을 결심했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을 걷게 된 것.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고,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몰랐을 때 한 교회가 나서 그들의 편에서 일 처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른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하룬 씨와 그의 동료들 가슴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 난민 캠프에서 일하고 있는 하룬 ⓒ김지연
그런 그를 로힝야 난민촌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당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사진 촬영을 위해 자주 그들을 만났었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변호사 개업도 하고, 또 그리스로 가서 사업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막연히 한국이 너무 그리웠죠. 하지만 떠난 지 오래 되서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도움을 받았던 교회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뻤다. 더욱이 항상 마음이 쓰였던 로힝야 난민을 돕자며, 이번에는 한국교회 측에서 도움을 요청해왔다. “흔쾌히 응했습니다. 한국에서 받은 도움들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힘든 사람들을 도울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죠.”
난민촌에 외국인은 발도 들일 수 없다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완강함을 하룬 씨와 그의 동료들이 발 벗고 나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31개의 난민 캠프 중 16번째 캠프는 한국 NGO에서 운영할 수 있게 되어, 현재 고아원과 병원을 개원했다.
▲ (사)지구촌구호연대에서 운영하는 캠프 ⓒ김지연
난민 이야기
짐을 대충 풀고 난민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촘촘히 지어진 집들 사이로 아이들이 오가고, 여성들이 살그머니 낯선 외국인 구경을 한다. 루프르호만(35세) 씨는 아내와 8명의 아이를 데리고 미얀마를 탈출했다. 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루프르호만 씨의 집에 군인이 닥쳐 불을 지르고 동생의 목을 벤 것은 순식간이었다. 동네는 피바다가 되었고 작은 마을에서 18명이나 사망했다.
다급하게 빠져나온 피란길에 어머니마저 사망했다. 조금 있던 돈을 브로커에게 건네고 방글라데시로 가는 배에 올랐다. 1주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겨우 목만 축이며 방글라데시로 넘어왔다.
“지금은 목숨은 유지할 수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캠프 밖을 나갈 수도 없고, 어떠한 경제활동도 하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한치 앞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선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죠.”
또 한 가정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집안이 어둡기만 하다. 15평 남짓한 공간에서 12명이 기거한다. 이 안에서 밥도 지어 먹고 밤에는 돗자리를 펴고 함께 잠든다. 총을 들고 들어 온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불을 질러대는 통에 랄미야(40세) 씨 역시 식구들만 챙겨서 빠져나왔다. 처가 식구들까지 12명이 함께 탈출했는데, 먹을 시간도 먹을거리도 없었다. 숨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다 8일 만에 캠프에 다다라서야 먹을 것을 입에 넣었다.
당시 처형은 만삭이었는데, 산통이 와 비닐하우스를 대충 만들어 몸을 풀었으나 아기는 죽고 말았다. 그 아이를 서둘러 땅에 묻고 성치 못한 몸을 끌고 또 걸어야 했다. “우리는 미얀마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별이 심해지기 시작하더니,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목숨만 빠져나왔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이 우리 고향이기 때문이죠.”라며, 랄미야 씨는 울분을 토했다.
숀지다(20세) 씨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어느 날 군인 12명이 느닷없이 닥쳐 남편 끄리물라(25세)의 목을 잘랐다. 당시 4살이 채 안된 아들 역시 군인들의 발에 채고 목을 베였다. 그리고 숀지다 씨는 군인 4명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당시 그녀는 임신 상태였다. 아이는 미얀마를 탈출한 후 지금의 캠프에서 출산했다. 지금도 숀지다 씨는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한다. 한참 장난이 많아진 아이를 돌볼 정신이 없어 끼니도 잘 챙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여성들은 많지만, 모두 숨기고 있어 숫자 파악은 물론 제대로 된 치료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요. 뭐든 배워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하지만 전 공부도 많이 못 했고, 무엇보다 무서워서 밖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 랄미야(40세) 씨 가족 ⓒ김지연
▲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숀지다 씨 ⓒ김지연
미얀마와 로힝야족의 증오관계는 역사가 깊다. 미얀마가 영국 식민 지배를 받던 1885년경 영국은 미얀마 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인도 벵골 지방(현재 방글라데시)의 쌀 재배농법을 알고 있었던 로힝야 인들을 끌어다 농사를 짓게 하며 준지배 계층으로 세웠다. 이후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로힝야족들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었고, 이런 탄압을 피해 로힝야족은 1970년경부터 미얀마를 떠나 떠돌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미얀마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이 노골화되고, 일부 로힝야인들이 무장조직(ARSA)을 만들어 대항하면서 지금의 사태에 이른 것이다.
▲ 난민촌 모습 ⓒ김지연
16캠프에 생긴 일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는 2016년 6월 난민들을 돕고 재해지역의 빈곤 및 질병퇴치를 위해 설립됐다. 현재 방글라데시 꾸투팔롱에 병원건축허가를 받고 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건평 약 300평 규모의 병원을 세워 운영 중이다. 2017년 12월부터 방글라데시 현지 의료인력과 대한민국에서 간 의료 봉사인력들이 진료와 치료를 하고 있다.
또한, 같은 부지에 1,234명의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아이들에게 교육하되, 방글라데시 말을 가르치지 말 것을 전제로 허가를 내주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일자리를 지키려는 조치일 것이며, 더 나아가 언젠가는 이들은 미얀마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일 수 있다.
▲ 고아원 아이들 ⓒ김지연
현재 로힝야 난민들의 시급한 문제는 식량부족과 영양실조를 들 수 있다. UN과 WFP(World Food Program), UNICEF가 긴급 식량배급을 실시하여 절대적인 기아에서는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충분하지는 못하다. 또, 마실 물의 문제인데 난민텐트 사이에 상수원과 하수원이 뒤섞여 비위생적인 물을 마시고 있어, 수인성 전염병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난민캠프 안에 디프테리아와 콜레라가 창궐하여 260여 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제적십자사와 국경없는의사회가 병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지만, 1차 병원의 경우 대기자가 너무 많아 발길을 돌리는 환자들도 많다.
▲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에서 운영 중인 병원에서 치료받는 아이 ⓒ김지연
로힝야 난민들의 거처는 방글라데시 군인과 경찰이 지키고 있는 겟토지역으로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고, 난민들이 그곳을 나올 수도 없다. IS와 같은 이슬람 테러조직들이 로힝야 난민들과 연계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막겠다는 의지이긴 하지만, 이로 인해 세계구호단체들의 지원사업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심각한 문제로 미얀마 군경들의 강간으로 임신한 여성들 문제이다. IOM(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Migrant)에서 설문과 상담을 진행한 결과 임신한 이들이 아이를 낳으면 이를 키울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또한 남편과 가족들의 학살을 목격한 이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이들을 위한 치유가 절실한 상태이다. 그뿐만 아니라, 로힝야 어린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교육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하며, 공민권, 거주이전의 자유, 참정권 등이 전혀 없는 실태이다.
난민 캠프의 보안을 담당하는 나시르 씨는 “우리 방글라데시 사람도 세끼를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우리는 두 끼를 먹더라도 로힝야 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어려워 봤기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인들을 돕는 이유를 밝혔다. 100만 명에 육박한 난민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먹을 것을 나누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보며, 얼마 전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오버랩 되었다.
하룬 씨 외에도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한 도시의 시장으로, 기업체의 사장으로, 그 외 여러 분야에서 자리를 잡으며 경제의 중추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겪었던 모욕과 설움은 잊고, 어려운 사람을 대하던 온정을 기억하며 지금은 지구상의 최약자들에게 그것을 다시 베푸는 중이다.
▲ 식량을 타가는 아이 ⓒ김지연
▲ 무료 급식을 기다리는 캠프 안 모습 ⓒ김지연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 관한 문구를 되새기며, 한 치 앞을 모르는 삶 앞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 고아원 아이의 기도하는 손 ⓒ김지연
▲ 미얀마 국경에서 넘어 오는 길 ⓒ김지연
▲ 난민촌 가족 ⓒ김지연
▲ 물을 뜨러 온 난민촌 아이 ⓒ김지연
▲ 난민촌 전경 ⓒ김지연
▲ 난민촌 전경 ⓒ김지연
▲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에서 운영하는 16캠프 앞 아이 ⓒ김지연
김지연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디아스포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할린의 한인들, 눈빛』, 『일본의 조선학교, 눈빛』 등의 사진집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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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다큐멘터리 사진가)